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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무렵
작가 : 한상진 (Sangjin Han) | |||
분류 : 개인전 | 장르 : 서양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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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25.07.15 ~ 2025.07.26 |
전시 개요
갤러리 담은 한상진의 《무렵》전을 개최한다. 작가가 강원도 양구에서 제주까지의 여정에서 포착한 풍경을 먹과 연필로 번역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한상진은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풍경"을 사유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에게 풍경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는 매개체다.
한상진은 풍경을 통해 존재론적 변화를 탐구하는 작가다. 그의 작업은 의미의 전체성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의 차이를 탐구하며, "귀향의 불가능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적 떠남을 실천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무렵"은 완결되지 않은 현재, 도래할 미래의 가능성을 품은 시간을 의미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을 재고하게 하는 전시다.
한상진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학부, 석사, 박사학위까지 수료했다.
작가의 글
나는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풍경을 사유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삶 속에서 예술을 만나고 구체화시키려는 여정은 예술이 규정된 양식이나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변화하는 삶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며 조우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풍경을 통해서 내가 나로부터 달라지는 지점과 새로운 이미지를 만나려 한다. 백두대간의 원시림과 산경(山經)은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에게 흥미로운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풍경과 상처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흔적이라고 말 할 때 우리는 가슴 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흔적을 담고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흔적은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되고 조명된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삶과 죽음의 경계, 내란과 독재, 계몽의 변증법 위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주장한다. 서로 다른 공동체의 목소리 안에 우리는 무위(無爲)의 빈 공간을 다시금 떠올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열림으로써, 존재는 온전한 것이 아님을 긍정할 때, 풍경의 삶, 삶의 풍경 속에 풍경이 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잉여의 공간 그리고 빈공간
풍경은 잉여의 공간이다. 의미화 할 수 없는 빈 공간인 풍경(존재)은 부재로도 현전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강원도 양구에서부터 제주의 거로마을에 이르는 여정은 걷기와 사색,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여정이었다. 갤러리 담에서 선보여질 작품들은 원주 회촌에 자리하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화관,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제주에 위치한 문화공간 양, 공주문화예술창작촌에 자리한 창작레지던시를 거점으로한 작업과 일련의 결과물을 제시한다.
의미의 부재, 도래하는 의미
의미를 통해 재현 불가능한 존재는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며 언어를 초과한다.
존재는 의미체계가 아니며 보편성으로도 특수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빈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물을 먹, 연필과 같은 소박한 재료를 통해 읽어간다. 여기에서 읽기(Reading)는 쓰기(Writing)와 함께 동시에 이루어진다. 동시성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행위임을 이야기 한다. 의미로부터 벗어난 버려진 사물, 역사의 문맥과 공공의 지표를 벗어난 풍경들은 장소로부터 확장된 자리, 흐르는 풍경으로 번역된다.
무렵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고전적 의미의 풍경화가 아니며 풍경과 내가 만남으로써 나를 여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재현 불가능한 순간들처럼 불가해한 삶의 비밀들과 연계된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작동하는 희열의 공간인 쥬이상스(jouissance)는 파괴적이며 알 수 없는 죽음충동을 동반한다. 일상 속에 사물과 풍경을 뒤틀어 놓는 충동은 아름다움 이면의 그림자, 잃어버린 조화에 대한 애도를 상기하게 한다. 나타나며 사라지는 것들, 흔적과 기억 속에 유령으로 존재하는 기표들은 의미로부터 벗어난 생산, 도래하는 의미의 부활이며 저물어가는 시간의 주변부_ 무렵에 대한 태도이다.
전체성의 이데올로기
데이터(data)화, 수치화를 통해 모든 존재를 의미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보는 자본의 힘은 폭력적이다. 그러나 의미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자기 차이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항해처럼 의미의 집으로 복귀하는 충만함의 원운동이 아니다. 본인에게 소요(逍遙), 응시와 명상은 치유(Healing)나 다듬어짐, 정화됨을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의미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떠남이며, 전체성의 이데올로기(의미의 장소)로 돌아오지 못할 불가능성 즉, 귀향의 불가능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이다.
한상진은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풍경"을 사유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에게 풍경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는 매개체다.
한상진은 풍경을 통해 존재론적 변화를 탐구하는 작가다. 그의 작업은 의미의 전체성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의 차이를 탐구하며, "귀향의 불가능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적 떠남을 실천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무렵"은 완결되지 않은 현재, 도래할 미래의 가능성을 품은 시간을 의미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을 재고하게 하는 전시다.
한상진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학부, 석사, 박사학위까지 수료했다.
작가의 글
나는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풍경을 사유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삶 속에서 예술을 만나고 구체화시키려는 여정은 예술이 규정된 양식이나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변화하는 삶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며 조우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풍경을 통해서 내가 나로부터 달라지는 지점과 새로운 이미지를 만나려 한다. 백두대간의 원시림과 산경(山經)은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에게 흥미로운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풍경과 상처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흔적이라고 말 할 때 우리는 가슴 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흔적을 담고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흔적은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되고 조명된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삶과 죽음의 경계, 내란과 독재, 계몽의 변증법 위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주장한다. 서로 다른 공동체의 목소리 안에 우리는 무위(無爲)의 빈 공간을 다시금 떠올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열림으로써, 존재는 온전한 것이 아님을 긍정할 때, 풍경의 삶, 삶의 풍경 속에 풍경이 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잉여의 공간 그리고 빈공간
풍경은 잉여의 공간이다. 의미화 할 수 없는 빈 공간인 풍경(존재)은 부재로도 현전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강원도 양구에서부터 제주의 거로마을에 이르는 여정은 걷기와 사색,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여정이었다. 갤러리 담에서 선보여질 작품들은 원주 회촌에 자리하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화관,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제주에 위치한 문화공간 양, 공주문화예술창작촌에 자리한 창작레지던시를 거점으로한 작업과 일련의 결과물을 제시한다.
의미의 부재, 도래하는 의미
의미를 통해 재현 불가능한 존재는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며 언어를 초과한다.
존재는 의미체계가 아니며 보편성으로도 특수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빈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물을 먹, 연필과 같은 소박한 재료를 통해 읽어간다. 여기에서 읽기(Reading)는 쓰기(Writing)와 함께 동시에 이루어진다. 동시성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행위임을 이야기 한다. 의미로부터 벗어난 버려진 사물, 역사의 문맥과 공공의 지표를 벗어난 풍경들은 장소로부터 확장된 자리, 흐르는 풍경으로 번역된다.
무렵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고전적 의미의 풍경화가 아니며 풍경과 내가 만남으로써 나를 여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재현 불가능한 순간들처럼 불가해한 삶의 비밀들과 연계된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작동하는 희열의 공간인 쥬이상스(jouissance)는 파괴적이며 알 수 없는 죽음충동을 동반한다. 일상 속에 사물과 풍경을 뒤틀어 놓는 충동은 아름다움 이면의 그림자, 잃어버린 조화에 대한 애도를 상기하게 한다. 나타나며 사라지는 것들, 흔적과 기억 속에 유령으로 존재하는 기표들은 의미로부터 벗어난 생산, 도래하는 의미의 부활이며 저물어가는 시간의 주변부_ 무렵에 대한 태도이다.
전체성의 이데올로기
데이터(data)화, 수치화를 통해 모든 존재를 의미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보는 자본의 힘은 폭력적이다. 그러나 의미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자기 차이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항해처럼 의미의 집으로 복귀하는 충만함의 원운동이 아니다. 본인에게 소요(逍遙), 응시와 명상은 치유(Healing)나 다듬어짐, 정화됨을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의미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떠남이며, 전체성의 이데올로기(의미의 장소)로 돌아오지 못할 불가능성 즉, 귀향의 불가능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이다.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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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默想 med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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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No Boundary